092.EUPHORIA
통밀 크래커 위에 요거트를 한 숟갈 올리고, 냉동 블루베리와 땅콩버터를 얹는다.
와작와작 씹는 소리가 경쾌하다. 여기까지면 딱 좋았을텐데 얼마 전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남아서 싸왔던 전을 에어프라이어에 넣는다.
한번에 다 데워지지 않아서 한번을 더 돌렸다. 180도에서 5분, 200도에서 3분.
나는 성격이 급하다.
한동안 먹지 않았던 야식이 당기는 걸 보니 살이 찌려나 보다.
우걱우걱 허기진 마음을 음식으로 게걸스레 채워넣고 전부 게워내는 건 청춘의 일.
서른의 나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살이 좀 찌면 다시 빼면 될 일이고, 몸의 항상성 때문에 언제나 그리 바뀌지 않는다.
몸이란 것은. (그럼에도 점점 턱선이 희미해지는 듯해, 다이어트는 곧 시작할 듯하다.)
HBO 시리즈 ‘유포리아’는 미국 청춘의 이야기다.
과거 영국 드라마 ‘스킨스’와 비슷한 분위기다. 방황하고 아파하는 청춘, 마약, 술, 섹스, 사랑과 질투,
이야길 심각하게 만들기 위한 우발적 범죄… (시즌 4의 결말은 가히 충격을 넘어 황당했지만.)
천국에 가까운 희열같은 제목과 대조적으로 드라마는 상당히 드라이하고 어둡다.
제목과 달리 유포리아에는 행복한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다.
약에 절어, 술에 취한 채로 섹스 중 외에는 그 아무도 기분 좋아보이는 인물이 없다.
여기 나오는 청춘들은 가슴이 찢어질 듯 울고, 너무도 두려워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쉽게 자신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들에 중독되고, 나약하게 굴복한다.
그럼에도 그 어느 누구도, 심지어 빌런조차도 밉지 않다. 이들은 빛나고 버거운 청춘이기 때문에.
어른이라고 인생이 쉬운 건 아니다.
조연(실은 거의 엑스트라지만)으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부모들을 보아도 그렇다.
아들딸보다 더 망가진 부모도 있고, 똑같이 방황하는 부모도 있다.
어른이라서 책임을 입고 가면을 쓰고 괜찮은 척 하고 있을 뿐,
생략된 장면에는 부모들이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무수한 씬 들이 있으리라. (그리고 결국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 사람또한. 젊음이 빛을 잃으면 죽음의 그림자가 슬슬 일어난다.)
시즌 1의 뮤지컬 같은 엔딩은 시원하지도 통쾌하지도 여운을 남기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끝났으나, 적어도 마지막 회의 프롬 장면만은 기억에 남는다.
못나고 못된 청춘들이지만, 그동안 센척으로 일관하던 캣이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그 마음을 받은 남자가 캣에게 다시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 그리고 두 입술이 포개어 질 때 먼 발치에서부터
아련하게 흘러나오는 노래, (극의 제목과도 같은) 정국의 ‘Euphoria’. 무대 아래에 은은하게 도는 조명과 어우러지며 문득, 젊고 아름답다 생각했다.
약물중독, 음식중독, 섹스중독, 관계중독… 그 어떤 망가진 청춘이라도 사랑할 수 있고 심지어 몇번이고 다시 사랑할 수 있고, 결국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사랑할 때만이 진정 아름답다는 것을. 그리고 파티를 빌어 고백하는 솔직함이야말로, 청춘만이 가진 특권이라는 것을.
그러니 이 시대의 청춘들이 자신의 결핍과 아픔의 동굴 속에서 이제 나와,
사랑이란 이름의 빛으로 걸어가기를, 눈이 시리도록 부시고 발가벗겨진 마음에 부끄럽다해도
타인과의 진정한 교감이 주는 또 다른 차원 높은 쾌락과 고통에 꼭 한번은 눈을 뜨기를.
아직 남은 나의 청춘과 이제 다가올 수많은 청춘들을 위해 잠시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