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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좋아해와 사랑해

인턴을 할 때였다.
선배 A B와 인턴 친구 하나, 이렇게 넷이 버거를 먹는데
어쩌다 인턴 제도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그 당시 나는 인턴 중 여자 최고령이었고
이미 죽도록 힘들었던 다른 인턴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필사적이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고딩 때도 나지 않던 여드름 꽃이 활짝 피어놀랐다. 그때, 평소 말이 적던 선배 B가 자신의 ㅈ같던 인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갸우뚱하는 선배 A 옆에서 인턴이란 현대의 악마같은 제도라 말했다.
나는 순간 B선배가 좋아졌다.

마치 그 순간, 아무도 몰라주는 내 맘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듯한 느낌.
누군가가 좋아지는 순간은 이렇듯 한순간이다.

좋아함은 그러나, 또한 찰나의 감정에 불과하다.

입사 후 누구보다도 사수로서 잘 챙겨주는 선배지만,
그 순간 느꼈던 강렬한 호감은 선후배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뛰어난 소설가가 아닌 다음에야, 지속적으로 호감을 교류하는 배타적 상호작용이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단순 호감 이상으로 좋아하긴 힘들다. 짝사랑도 실은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오는 숭고한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좋아해는 쉽지만 사랑해는 어려운 것이다.
나같이 싫은 게 많은 까다로운 사람도 벌써 2018년 한해에만 대여섯명 정도를 새로 좋아하게 됐다. 기존에 좋아해온 사람까지 합치면 한 서른명 정도쯤 되려나.

누군가를 좋아하고 생각하는 건 즐겁다.
그것 자체로 소소한 활력을 준다. 마치 우리가 연예인을 덕질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 사람이 날 싫어한다면 슬프겠지만, 다른 사람과 나를 같이 좋아한다해서 그닥 문제가 되진 않는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가볍다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무겁지도 않다. 심각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쉽지도 않을 뿐더러
고통스럽기도 하다. 사랑하는 상대가 나만큼의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을 때, 우리는 힘들어한다. 때론 거인이 내 심장을 꽉 쥐어짜는 것만큼 아플 때도 있다.

반면에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
다름이 아니라 자주 웃어서다. 온 신경과 정신이 그에게 향해, 나도 모르게 입꼬리는 올라가고 목소리 톤은 높아진다. 남에게 보이지 않던 내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고 깊은 내면까지 이해받고 싶어진다.

벅차고 행복한 순간이 많아짐과 동시에
불안하고 가슴 시린 순간도 늘어난다.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이란 걸 하게 되면.

인생 첫 촬영도 앞두고 있고
여러모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슬슬 사랑이 하고픈 걸 보면
이번 겨울이 춥긴 춥나보다.

돌아오는 내년엔 꼭 예전처럼 웃을 수 있길.
많은 이들이 누군가가 좋아지다가 결국 사랑하게 되는
기적같은 황금돼지해가 됐음 좋겠다.

세상엔 웃음이 늘 부족하므로.